<양말>
- 김 수 연
 

어릴 때 꽤나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조금만 긁혀도 부어오르는 예민한 살성 탓에 털옷은 맨살에 입지도 못했다. 혼방 옷도 까실한 면이 있으면 그 옷을 기어이 벗고 싶어 팔목을 걷어 낑낑대곤 했다. 그렇다고 내복을 입고 다니지도 않았으니 옷 고르는 게 쉽지 않았다. 그 까다로움과 예민함은 집 앞 슈퍼에 갈 때도 여지없었다. 맨발에 슬리퍼 질질 끌고 가면 되었을 백 미터 거리를 꼭 양말 갖추고 운동화 신고 다녔다. 
 

그 날도 그러한 날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 가을날, 삼대가 모여 살던 할머니집에서 이른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른들의 심기가 아까부터 불편해보였다. 원래도 친척간 불화가 잦았던 집이라 그러려니 하고 밥을 먹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 댁 강아지 요크셔가 집을 나간 것 같으니 빨리 데리고 들어가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순혈을 자랑하는 놈이라고 직접 데리고 왔던 녀석이었다. 순혈을 보증하는 서류도 보여주시며 좋아하셨던 모습이 선하다. 둥근 식탁에서 조용히 밥을 뜨시던 아버지가 맏이인 나에게 눈짓으로 일어서라고 했다. 가서 집 나간 녀석을 데리고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부엌 바로 옆에 있는 내 방에 들어갔다. 맨발이었기 때문에 양말을 꺼내 신고는 바지도 갈아입고 부엌을 가로질러 그렇게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서 가볍게 뛰었다. 대문을 열고는 더 뛰었다. 그런데 초인종을 눌렀던 경찰 아저씨가 골목길 끝에서 나를 난감하게 쳐다보고 계신다. 고개를 돌리니 자주 가던 구멍가게 앞에서 우리집 요크셔가 동네 잡종 수컷과 붙어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순간, 공포로 다가왔다. 징그러운 교미에 놀란 것도 아니고 안면이 있는 경찰 아저씨에게 무안해서도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혼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5분을 망설였을까, 10분을 망설였을까.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요크셔와 잡종의 교미를 내내 보았다. 시간이 흘러도 좀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싶어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은 아버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갈겼다. 네가 양말만 안 신고 나갔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셨다. 당황한 어머니와 식모 아줌마와 할머니가 내게 달려드는 아버지를 뜯어말렸다. 쫓기듯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간 나는 방문을 잠그고 한참을 울었다. 옆에서 어머니가 위로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밖에서는 계속 문을 걷어차는 아버지 발소리가 들렸다. 서글펐다. 처음으로 맞은 것이기도 했지만 맞은 이유가 그냥 서글펐다. 양말을 신고 나간 나를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내가 좀 더 일찍 나갔더라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어느 날의 그저 그런 저녁처럼 그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오만 생각을 하고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떤 사과의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불편하게 아버지를 오랜 세월 각인했다.
 

지금도 목이 긴 양말을 보면 그날의 일이 불쑥 떠오른다. 가급적 목 있는 양말을 사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때 왜 그러셨는지는 예전에 다 알았다. 그리고 용서했다. 나를 쳐다보던 경멸의 눈빛, 뺨에 남은 손자국, 다른 식구들의 아우성, 차갑게 식은 반찬 냄새도 다 지나갔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이제 14년이 흘렀다. 늘 가슴 속에 응어리 진 삶을 살았던 아버지여서 더욱 그립고 애잔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날의 울음도 함께 스쳐지나간다. 한 마디 말만 해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싶다. 그때 미안했다고. 정말로 미안했다고. 그러면 울면서도 웃으며 아버지를 꼬옥 안아드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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