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한국의 경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눈부신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과 수출중심으로 근대화하였고, 온 국민이 합심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다.

변변한 공장 하나 없던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발표했던 1967년 3억 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액은 3,600억 달러를 돌파했고, 100달러 남짓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처럼 빠른 한국의 경제성장 배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손꼽는 학자들이 많다. 한국 경제를 바꾼 가장 위대한 순간 1위로 손꼽히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비포장 길을 돌아 15시간 이상 걸렸던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이동 시간을 4시간 반으로 단축하여 획기적인 물류비 절감과 유통 혁명을 가져왔다.

경부고속도로는 생산지와 주요 대도시 그리고 수출 항구 간의 물류수송을 원활하게 하여 당시 경제개발계획의 주요 목표였던 수출 중심의 중화학공업단지가 형성되었다. 철강, 석유, 화학, 조선, 자동차, 전자 등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렇게 개편된 산업구조는 수출을 증대시켜 국민소득을 향상시켰고 소비를 활성화하여 내수산업을 발전시켰다. 산업발전과 소득중대는 산업화를 촉진했고, 이는 다시 전반적인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경부고속도로는 그 동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지역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정보와 문화 등 다양한 교류를 가져왔다. 나아가 국민적 역량을 결집하여 가난을 극복하는 농업기술이 전국으로 전파되고, 생산된 농산물을 대도시로 유통시킴으로써 농촌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자본도, 기술도, 가재도 부족한 상태에서 건국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를 세계에서 최단기간에 건설한 대 역사는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시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국의 건설업이 크게 융성하였고, 진취적인 도전정신은 해외 진출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이렇듯 경부고속도로는 눈부신 경제성장의 견인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역사는 우리나라 경제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960년대 위대한 도전으로, 1970년대 기적의 역사를 이루고, 1980년대 탄탄대로를 닦아, 1990년대 성장가도를 달려 2000년대 사통팔달의 중심축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고속도로 전체 교통량의 20%가 이용하는 대표노선이자, 명실상부한 1번 고속국도이다.

시급한 경제부흥을 위해 고심하던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관료들은 1964년 독일 방문 시 1932년 건설된 아우토반을 기반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현장을 보고 싶은 감명을 받았다. 독일로 돈 벌러 간 광부와 간호사들의 눈물은 위대한 도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계획은 경부고속도로를 기반으로 하는 수출 형 기간산업 육성에 초점을 두었고, 1967년 5월 2일 전국을 큰대(大)자로 연결하는 대국토건설계획이 발표 됐다.

1958년 2월 1일 처음으로 서울~수원 구간을 착공 한데 이어 구간별로 단계적으로 공사에 들어갔지만, 시작부터 어느 한 가지 쉬운 일이 없었다. 수많은 반대에 직면해야 했고, 유달리 모질었던 자연재해도 극복해야 했다. 자본도 장비도 기술도 부족했지만 정부와 기업, 국민과 군인까지 모두 힘을 모아 열정적인 도전을 이어갔다.

공사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해 때로는 소중한 인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그래도 도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장비가 없으면 사람이 대신하고 땅이 얼면 불을 피우고, 장마로 교량이 유실되면 다시 더 튼튼하게 만들어 나갔다.

열정을 한데 모으고, 머리를 맛대어 시련을 해쳐 나가는 가운데 경부고속도로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8년 12월 30일 서울~오산간 45.5km를 시작으로 대전~대구 구간을 제외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1969년까지 개통된 것이다.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와 초최의 민자고속도로인 언양~울산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것도 이쯤이었다.

1969년 2월 15일 고속도로 건설을 주관하고 관리하기 위한 전담기관으로 한국도로공사를 설립했다.

자립경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강한 의지와 뜨거운 열정으로 뭉쳤던 한국은 땀과 눈물의 대장정 끝에 마침내 명실상부한 고속도로 시대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공사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며 붕괴를 거듭하던 당재터널(충북 옥천)이 완공되면서 마지막 남은 대전~대구구간이 개통되었다. 1968년 2월 1일 첫 삽을 뜬 후 2년 3개월만에 서울~부산이 이어졌다.

1970년 7월 7일 준공식이 열린 대구공설 운동장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통령도 눈물을 쏟아내고 이른바 ‘군관민’이 함께 감동과 감격과 환희의 순간을 같이 했다.

이 순간을 맞기까지 428km 건설에 429억원이 들었고 9백만명이 투입되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규모였다. 이로써 서울~부산간 이동시간은 3분의 1로 대폭 줄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운전자들의 안전을 위해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인 추풍령에 최초로 휴게소와 주유소를 설치했다. 노면파손과 대형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과적차량도 단속하기 시작했다.

일부 구간은 곧바로 재포장을 해야 했고, 교량이나 터널의 유지보수 방안도 마련했다. 교통안내 전광판이나 각종 안전시설물을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에 걸맞도록 고속도로 시스템을 정비하였다.

900만명이 428km... 기적의 역사를 만들고
대한민국 경제대국으로 성장시켜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자신감을 얻어 1973년 11월 호남·남해고속도로, 1975년 10월 영동·동해고속도로 및 1977년 12월 구마고속도로를 개통하며 전국적 교통망을 마련했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는 새마을 운동이 더욱 속도를 내고, 포항제철 및 여천 석유화학공단 등 산업단지가 속속 들어서게 되었다.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돌파하는 등 산업화는 초속으로 진행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고속도로 시대를 맞은 이후 10년 동안 한국경제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경부고속도로를 기반으로 88올림픽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를 추가적으로 개통했고 1980년대 말부터는 기존 4차로에서 단계적으로 확장공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후 수많은 고속도로를 개통하여 2007년에는 전국 고속도로 3,000km시대를 열었고, 교통량에 따른 탄력적 운영방법인 버스전용차선, 갓길차로제가 도입되었으며 하이패스 도입으로 인해 나들목의 정체를 해소할 수 있었다.

이렇게 43년의 전통을 지닌 경부고속도로는 총체적 빈곤으로 인한 좌절의 식에 국민 역량을 결집시켰고, 희망과 열정의 상징이 되었다. 위대한 도전으로 기적의 역사를 만들고, 영광의 순간마다 늘 함께하며 대한민국을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경부고속도로는 지금도 연간 13조원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한국 경제 발전의 중심에 있었던 경부고속도로, 이제는 경제위기 극복과 선진국 진입의 중심에 서서 또 다른 기적을 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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