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웅 논설위원. 한반도 통일연구원 원장, 정치학 박사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보자. 지금부터 꼭 120년 전,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사건이 우리 민족 앞에 펼쳐졌다. 조선 왕조의 황후가 일제 앞잡이들이 휘두른 일본도에 무참히 희생됐다.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그것이다.

고종 시대인 1895년, 백성들은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이들은 느닷없는 국모의 시해 소식에 하늘이 무너질 듯 놀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비탄에 잠겼다. 그러나 나라가 스스로 간수할 힘마저 없는 처지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당장 일본에 선전포고를 해야 할 만큼 충격적인 사안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유달리 일어났던가? 그 도화선은 1914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세르비아인에게 피살된 사건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징벌에 들어갔다. 두 나라간 전쟁은 열강 제국주의의 패싸움으로 번져갔다.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황태자 암살의 총성 한방이 세기적인 참상을 낳은 단초가 됐던 것이다.

명성황후의 비극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경술 국치의 예고편이 됐다. 일제는 치밀한 각본에 따라 독립국가의 왕후 살해극을 연출했고, 진실을 철저히 은폐했다. 국제사회에는 거짓 자료들을 늘어놨다. 일제는 당시 들끓는 국제 여론을 무마하고자 ‘민비 살해범 공판’의 연극판을 벌였다. 피고 미우라(외무성 공사)와 공범들은 이듬 해인 1896년 히로시마 지방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끝을 모르던 일제의 거듭된 침탈 만행은 원자탄 두발에 멈칫했다. 전범자들은 멀쩡한 채 자국민의 희생만 남겼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제의 군화발은 일단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명성황후를 둘러싼 역사는 이제 예술로까지 승화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뮤지컬 공연은 장기 인기품목이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다. 비극적인 역사가 예술적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표제곡들 중에 ‘나 가거든’을 꼽아보자.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까지도 사랑하길...
부디 먼 훗날
나 가고 슬퍼하는 이
나 슬픔 속에서도 행복했다 믿게...”

후세의 예술적 창작이긴 하지만, 역사가 던진 여운은 길게 남는다. 역사의 비극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비극이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면, 능히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동서양의 성인 말씀에 “원수를 보되 부모처럼 섬긴다”, “원수를 사랑하라”로 일치하고 있음은 진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자비와 사랑의 정신은 영원 불멸한 것임을 일깨워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극우 언론에 실린 칼럼이 화제다. 양식있는 일본인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먹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칼럼은 중국 전승식을 계기로 한 한⦁중 정상 외교를 비틀고 싶어했다. 칼럼은 한국 대통령의 중국 전승식 참석에 대해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사대주의를 일삼는 이유는 민족의 나쁜 유산 때문”이라고 전제했다. 그리고는 “조선에는 박대통령 같은 여성 권력자가 있었다”면서 “민비가 일본과 외교조약을 체결한 이후 청군에 기대고, 나중엔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다가 암살됐다”고 양인을 빗댔다. 차마 언론에 실린 글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역사 왜곡도 그렇거니와 섬뜩한 살기마저 엿보인다. 일본에서 자살을 미화한 글은 몇 번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살인을 미화하거나  국가 원수를 빗대는 공개 칼럼은 과문해서인지 처음 봤다.

이런 저급한 칼럼이 또 다시 산케이 신문에 버젓이 게재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각종 오물이 극우 매체라는 하수구를 통해 흘러나온 것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일본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뿐인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무지몽매한 글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아예 무시하는 것도 때론 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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